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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블루스> - 두 남자의 인생 최대 에피소드

Lib'rary

by ZEIl 2020. 3. 13.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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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평범해지기를 기도했다. 평범하게 대학을 졸업해 회사에 취직하고, 평범하게 돈을 벌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미래 따위를 함께하는 것 말이다. 그 무엇도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빚만 진 채 대학을 졸업했고, 원하지 않은 직업을 가졌다. 평범하게 돈을 벌지도 못했고, 결혼은 커녕 애인도 없다. 그러니 키워야 할 아이도 없다. 그려야 될 미래나 꿈따위는 이미 소주와 바꿔 먹은지 오래다. 

그래도 나는 내 인생이 바뀔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착각일 뿐이었다. 나는 인생은커녕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고, 그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그저 선택된 것 뿐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름과 얼굴, 체형이 정해지듯 모든 게 선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당신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여기 두 남자가 차 안에서 마주하고 있다. 운전석에 있는 남자는 의도치 않게 납치된 남자를 다시 납치한 입장이고, 납치된 남자는 대기업 회장의 아들로 납치된 상황에서도 여유로움과 오만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 둘이 마주하고 있는 상황과 현실은 모순적이다. 납치된 상황에서 “놀고 자빠졌네. 내가 말야 인생 경험이 많은 건 아니지만 너같은 놈은 딱 봐도 알지. 이래저래 되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니까. 불만의 포커스를 세상으로 돌려버리는 인간. 객기부리고 꼴값 떨다가 인생 마감하는 그런 스타일”라고 어줍지 않은 훈계를 한다. 그런 그에게 노숙자 재만은 “모든 걸 다 가졌다고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하지마”라고 위협을 가한다. 이 두 남자가 서로 쫓고 쫓기는, 물고 물리는 에피소드가 이야기의 골자를 <노숙자 블루스>는 궁극적으로 헬조선에 유행하고 있는 수저 계급론를 향한 알레고리다.    

사실 태어날 때 정해진 있는 수저의 재질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러나 수저없이 태어나 세상을 한탄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재만이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세상에 미련이 없는 회장 아들이나 다들 자신들만의 결핍과 문제점이 있다. 결핍은 수저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문제다. 이 두 결핍으로 가득 찬 청년이 인생 최고의 에피소드로 채워나가는 <노숙자 블루스>는 두 사람이 서로가 극적인 상황에서의 행동을 통해 이해하고 소통하고 공감한다. 결국 노숙자 재만이나, 회장 아들이나 각자가 선택된 것이며, 그 선택에 따라 충실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런 바꿀 수 없는 선택의 과정에 재만과 회장 아들은 자신들이 모두 선택된 존재라는 것에 순응하고 연대한다.                

포스트 윤태호, 조금산

<노숙자블루스>는 '포스트 윤태호'인 조금산의 작품이다. 조금산을 포스트 윤태호라고 칭한 것은 그의 작품이 놀라울만큼 윤태호의 그것과 유사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처음 조금산의 작품을 봤을 때, 나는 윤태호가 그린 것이라 착각했다. 그림체가 유사했고, 잘 짜여진 스토리가 비슷했다.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주제로 다룬다는 것도 비슷했다. 윤태호는 [이끼], [미생]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지만, 그에 비해 조금산은 아직까지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진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웹툰 시장을 비교적 초기에 개척한 다음의 '만화속 세상'은 현재 네이버 웹툰 플랫폼에 밀리고 있는 실정인데다, 웹툰을 향유하는 연령이 어려짐에 따라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다루는 조금산의 웹툰이 널리 읽히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윤태호보다 조금산의 작품들이 조금 더 즐겁게 다가왔다. 그 이유를  찾아보자면, 윤태호의 작품들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한번쯤 맛을 본 맛집이라면, 조금산 작품들은 허름하고 나만이 아는 추억의 밥집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금산의 작품들은 언제 찾아도 익숙하지만, 늘 그리운 맛이 있다. (물론 시동이 흥한 이후 이제 조금산 작가는 이제 너무나 유명해졌다는 함정이 있다. 

한국형 느와르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노숙자 블루스>    

조금산의 작품은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머와 블랙코미디가 내재돼 있다. 그래서 <노숙자 블루스>를 비롯한 조금산의 작품들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구분하기에는 모호하다. 이는 <노숙자 블루스또한 마찬가지다.  형식상으로는 스릴러나 블랙 코미디보다 느와르에 가깝다. 그러나 기존의 한국형 느와르가 보여주던 뒷골목 폭력배들의 의리와 배신, 사랑이 주된 뻔하디 뻔한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상투적인 느낌 대신 조금산 작품에 있는 것은  인간성, 연대, 연민이 가득 차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노숙자 블루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모든 사건, 사고가 마무리되고 재만과 회장 아들이 마주한 상태에서 음악이 흐른다. 바로  Daft Punk의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다. 그 일레트릭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노숙자 재만을 보면서 나는 홀로 그에게 읊조렸다. 

그래,  우리는 모두 선택된 것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선택이 잘못되었고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고 해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야 한다. 남들처럼, 누구나가 사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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