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3이 되면 학교에 각 성적에 따라갈 수 있는 대학의 커트라인 표가 교실 벽에 붙어 있었다. 지금도 그 '표'는 잔존해 여전히 교실 벽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 표와 상관없이 매년 각 대학, 학과의 순위표는 오르락내리락 거린다.
최근, 최근이라고 해봐야 꽤나 오래된 얘기지만 가장 상위권에 위치한 학과는 언제나 '의과'다. 의사란 직업이 정말로 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의사란 직업에 가진 환상 때문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의사가 장밋빛 미래가 예견된 돈 잘 버는 고소득 전문직이라서인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수도권 및 지방 그 어느 의대이건 수능에서 최상위 성적을 맞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심지어 대학 병원을 가지고 있는 지방 의대인 경우 서울대 의대를 제외한 특정 학과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의과대학에 입학한 이들 중 성적이 가장 우수한 이들은 주로 피부과나 성형외과 쪽으로 빠진다는 것이다. 학교 및 학과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재능이 넘쳤던 이들이 성형외과나 피부과로 빠진다니 좀 이상하지 않은가라는 반문이 든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애당초 돈이나 벌겠다는 생각으로 의대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한 인간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외과의가 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다. 역설적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흉부외과는 누가 지원하는가라는 의문 말이다. (흉부외과의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그 중요성과 반비례하는 지원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 흉부외과다.)
외과의, 의학드라마에서 다루는 유일한 의사. 의학 드라마에서는 흉부외과를 제외하곤 딱히 다른 분야, 외과의사를 다루지 않는다. (결코 성형외과나 피부과, 혹 안과 등의 의사가 의학드라마에 등장할 리 없다는 소리다.)
흔히 흉부 외과의는 의사의 꽃이라고 불린다.(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무엇의 꽃이라는 것은 찬사가 아닌 조롱이다. 보병은 군대의 꽃이라는 말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가이 아키라 원안, 노기자카 타로 작화의 <의룡>은 현재 의사가 겪고 있는 문제를 직시하며 보여준다. 이는 김명민, 김선균 주연의 드라마 <하얀 거탑>에서 보여줬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보다 일본의 대학병원이 조금 더 교조적인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는 한국이라고 해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문제다. 일본 의료에 관한 고발과 봉건 사회와도 같은 의국의 현실을 일본 만화 특유의 먼치킨식 천재 외과의의 능력과 결합해 수술해 버리려 하는 <의룡>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을 정도로 꽤나 수작이다.
뒤로 가면 갈수록 <하얀 거탑>과 마찬가지로 의사의 사명보다는 제도 개선 및 의국 내 파벌 및 정치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긴 한다. 그럼에도 <의룡>자체가 말하려 하는 내용에는 공감이 갔고, 초반 천재 외과의 아사다 류타로가 말하는 주옥같은 말들에 깊이 공감이 갔다.
<의룡>에서 등장하는 봉건 사회적인 의국의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소위 '사'자를 가진 직업들은 대부분 봉건 사회 형태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검사'다. 검사들에게는 '검사동일체(檢事同一體)의 원칙'이 있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란 본래, 검찰 조직 전체가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상명하복 관계를 가지고 검찰 사무를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은 정치사건을 처리하는 검사의 독립성을 해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돼 지난 2004년 폐지됐다.) 그러나 해방 이후 검찰 조직이 생긴 이래 존재했던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여전히 잔존한다. 이는 법조계 자체가 사법연수원이라는 하나의 교육 기관 아래 '기수' 문화와 전관예우를 강조한다는 것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와중에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검사로서 조직 내 자부심과 더불어 내부 결속을 훨씬 더 단단하게 해주는 '검사'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자 악덕인데, 검찰 조직이 이 원칙을 포기할리 결코 만무하다.
그런 점에서 검사로 임용되는 모든 이들은 돈과 권력의 유혹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유혹 앞에 물들지 않을 검사가 얼마나 될 것인가. 흔히, 경찰은 돈에 물들고 검찰은 권력에 물든다는 표현이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의룡>에도 나온다.
'돈에 물드는 것이 의국에 물드는 것보다 낫다'
그렇다. 분명히 이 세상에 태어나 보면 우리는 이것저것에 치이면서 무언가에 물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에 어떻게 물들고 싶은가.
이런 고민은 <의룡>을 볼 때마다 한 번쯤은 꼭 하게 된다. 처음 볼 때는 나는 무엇에 어떻게 물들고 싶은가였지만, 지금은 무엇에 어떻게 물들었나라는 생각이 들어 늘 씁쓸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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